[예배 설교] 내가 쌓은 탑은 무엇인가 – 122919

창세기 강해 (7) – 내가 쌓은 탑은 무엇인가
창 11:1~9

I. 서론

오늘 본문은 2019년도 마지막 예배를 드리는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본문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은 창세기를 양분하는 첫 번째 부분의 마지막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는 전체가 50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 번째 부분이 1~11장까지의 원시 역사에 대한 것이고, 두 번째 부분이 12~50장까지의 족장 역사에 대한 부분입니다. 오늘 본문은 원시 역사의 마지막 부분에서 일어난 사건이고, 족장 역사를 준비하는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2019년 마지막 예배를 드리면서 2020년을 준비하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본문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II. 본론

1. 세 가지 “자 ~ 하자”

오늘 본문의 구조를 보시면, “자 ~ 하자”라고 시작하는 부분이 세 군데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영어로 말씀 드리면, “Come, Let us~”라고 시작하는 문장입니다. 3절과 4절에는 사람들이 서로 하는 말이고, 7절에서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서로 하시는 말씀입니다. 먼저, 3~4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3~4절,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벽돌로 돌을 대신하고,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여 이들이 하고자 하는 것은 성읍과 탑을 건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성읍과 탑을 건설하는 이유는 흩어지지 않고 함께 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이러한 모습을 보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7~8절,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여러분은 하나님의 이런 행동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열심히 살고 있는 사람들 방해하는 것 같지 않으십니까? 만약 여러분이 7~8절을 읽으면서 아무런 불편함도 느끼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은 신앙심이 아주 좋으시거나 아니면 아무런 생각 없이 성경을 읽으시는 것입니다. 신앙심이 아주 좋으시다는 것은 전후 문맥을 잘 알고 계시다는 의미이고, 아무런 생각이 없으시다는 것은 본문의 의미를 전혀 모르고 계시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읽을 때에 세 가지 속담이 생각났습니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 “사람이 죽으면 이름을 남기고, 범이 죽으면 가죽을 남긴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이 속담들이 오늘 본문에 그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4절,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그런데, 이 속담들은 모두 좋은 의미의 속담 아닙니까? 열심히 노력한 것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열심히 노력하면 후대에 길이 남을 이름을 남길 수 있다. 하나되어서 공동의 목표를 이루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노력을 용납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셔서 더 이상 그들이 계속 일을 하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과연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혹시 우리가 지난 2019년 한 해 동안 쌓은 공든 탑도 하나님께서 내려와서 보시고, 용납하지 않으시는 것은 아닐까요? 혹시 우리가 일평생 쌓은 공든 탑도 하나님께서 내려와서 보시고, 다 무너뜨리시는 것은 아닐까요?

2. 두 가지 “문제”

신학자들은 본문을 통하여 두 가지 문제를 발견합니다. 하나는 소극적인 문제이고, 또 다른 하나는 적극적인 문제입니다.

1) 먼저 소극적인 문제입니다.

이들의 문제는 “하나님 없는 도시”를 건설하려고 한 것입니다. 시날 평지에서 사람들이 쌓은 것은 단순한 탑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도시였습니다. 8절,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우리는 지금까지 창 1~11장에 나오는 원시 역사를 다루면서 성경 최초로 등장하는 단어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도시”라는 단어도 성경 최초로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사람들은 바벨이라는 도시를 건설하고 있었습니다. 도시를 건설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들이 만들고자 했던 도시는 하나님의 도시가 아니라, 하나님이 없는 도시를 건설하고자 한 것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 “그들은 그들의 생각 속에 하나님을 완벽하게 지워 버리고 온 인류를 하나로 묶어 하나의 견고한 무신론적 공동체를 형성하고자 시도하였다. 바로 바벨탑이었다.” 알리스터 맥그래스 “노아의 홍수 이후 세상에 다시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사람들은 다시금 인간을 신뢰하기 시작한다. 다시 한 번 이전과 동일한 인간의 본성이 고개를 내민다. 유명해지려는 욕망, 불사의 존재가 되려는 욕망, 완전한 안전을 확보하려는 욕망이 등장한다.” 그러니까, 시날 평지에서 이들이 쌓은 탑은 단순한 탑이 아니라 하나님이 필요 없는 도시를 건설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도시의 특징은 유명, 불사, 안전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사람이 성공해서 유명해 지고, 사람이 건강해서 죽지 않게 되고, 사람이 화합해서 안전하게 되면, 하나님이 필요 없는 세상이 되는 것입니까? 제 생각에는 그럴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필요가 없어질 것 같습니다.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이런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는 일마다 성공을 하고 여러분이 계획한 것이 모두 이루어져 유명해진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찾고 예배하겠습니까?” “만약, 의료 기술이 발달해서 매년마다 새롭게 세포가 재생되도록 해서 여러분이 더 이상 늙지 않고 영원히 건강하게 살 수 있게 된다면, 여러분은 그래도 하나님을 여전히 찾고 예배하겠습니까?” “만약,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서 핵 문제와 테러 문제가 해결되고 이 땅 위에 완전한 안전이 이루어진다면, 여러분은 그래도 계속 하나님을 찾고 예배하겠습니까?” 저는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찾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는 모든 일이 성공하고, 죽지 않아도 되고, 내 삶이 안전하게 된다면,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이 필요할까요?

그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자를 상징하는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 19:23~24,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예수님께서는 “이르시되, 진실로 이르노니, 다시 말하노니” 세 번이나 반복하실 정도로 강조하셨습니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의 삶 가운데 하나님이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간이 성탄 주간이었습니다. 여러분 마음에 우리의 구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탄생이 큰 감동과 감사가 되셨습니까? 아니면, 매년 반복되는 성탄절, 그냥 평소와 같이 그럭저럭 보내셨습니까? 만약 우리 삶 속에 성탄의 기쁨과 감격이 없다면, 그 이유가 무엇때문이겠습니까? 우리 삶에 굳이 구주가 필요치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뒤집어서 생각해 보면 이런 것입니다. 내 삶에 구주가 필요하다고 절실히 느낄 수 있는 사람을 복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구주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대부분의 경우는 우리가 성공하거나 건강하거나 안전하다고 생각할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패하고, 아프고, 불안전한 상황이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올랜도소망교회를 개척하면서 벤치마킹을 한 교회가 3곳 있습니다. 서울 온누리교회, 서울 사랑의교회, 서울 소망교회입니다. 온누리교회는 해외 선교가 특징인 교회이고, 사랑의교회는 제자훈련이 특징이 교회이고, 소망교회는 경건한 예배가 특징인 교회입니다. 지금까지 이 세 교회의 흉내를 내도록 노력은 해 왔습니다. 온누리교회를 본받아 선교 하려고 모든 헌금의 십일조를 해외선교사를 위해 보내고 있습니다. 사랑의교회를 본받아 제자훈련을 하려고 성경 공부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 삶에 적용하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소망교회를 본받아 경건한 예배를 드리려고, 예배 시작 전에 제가 돌아다니면서 인사하지 않고 10~15분 정도 피아노 찬양을 들으면서 기도와 회개와 묵상으로 예배를 준비하도록 인도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성장하면, 한 가지 더 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올랜도소망교회에서 가능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영국 런던 올소울스 교회를 본받아 30~40명 정도의 오케스트라의 연주와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온누리교회에 대한 것입니다. 온누리교회는 지금까지 2,000명 이상의 해외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 이것은 인류 역사상 단일 교회에서 파송한 최대의 인원일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하게 되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물론 한 가지 이유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이 한 가지 이유를 제외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온누리교회에서는 해외선교 20주년 25주년 행사 때마다 꼭 이것을 언급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한남동 기도 모임”입니다. “한남동 기도 모임”이라고 이름이 지어진 이유는 한남동에 거주하는 이상자 권사님이 매월 둘째 주 월요일 오후 5시에 자신의 집을 오픈해서 기도회를 열었기 때문입니다. “한남동 기도 모임”은 1988년부터 시작해서 최근까지 30년간 한 번도 쉬지 않고 지속되었습니다. 권사님이 댁에 없더라도 모임은 계속 권사님 댁에서 진행했다고 합니다. 보통 30~40명, 많게는 100명까지 이 한남동 권사님 댁에서 모여서 기도를 했습니다. 이 모임을 통하여 수많은 선교사님들을 기도로 후원했을 뿐만 아니라 이 모임을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선교사로 헌신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자권사님이 왜 자신의 집을 오픈했는지 아십니까? 이상자 권사님은 원래 교회를 다니지 않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권사님의 나이가 57세가 되던 때에 남편이 갑작스럽게 폐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성공 가도를 달리던 남편, 그렇게도 건강하던 남편, 그렇게도 자신의 안전망이 되어 주었던 남편이 갑자기 없어진 것입니다. 다행히 남편이 돌아가시기 전에 온누리교회 한상원 목사님이 와서 복음을 전함으로 남편이 예수님을 믿고 평안히 천국을 가게 되었고, 권사님도 그 때부터 온누리 교회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권사님은 하늘같이 믿었던 남편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자신의 곁을 떠나자, 상심되고 허전한 마음을 누를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온누리 교회 수련회를 참석하여 선교 특강을 듣게 되었는데, 선교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나이가 이미 57세 였습니다. 남편도 없이 혼자서 선교지로 생각은 도저히 할 수가 없어서 기도로 선교사님을 도와야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 마침 하용조 목사님이 선교를 위해 기도할 장소를 찾고 있었는데, 권사님이 기꺼이 자신의 집을 오픈했고, 이렇게 시작된 “한남동 기도 모임”이 지금까지 30년 동안 지속된 것입니다. 그래서, 온누리교회는 해외선교 기념일마다 “한남도 기도 모임” 그리고 “이상자 권사님”이 꼭 언급합니다. 그런데, 이상자 권사님이 한국 시각으로 지난 토요일 새벽에 88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분이 바로 우리 교회 한유현 집사님 장모님이시고, 이숙경 집사님 어머니 되시는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온누리교회가 지금까지 해외 선교를 잘 감당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상자 권사님이 뒤에서 보이지 않게 기도와 식사와 장소로 헌신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권사님이 예수님을 믿고 이렇게 헌신하게 된 계기는 남편을 여의는 아픔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남편 분이 계속 살아계셨더라면, 남편 분이나 권사님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회에서 너무나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본인도 스스로 “돌밭”같은 마음이었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아픔이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슬픔이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어려움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왜 그것을 허락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을 만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구원받고 구원받은 자로서 생명을 전하는 자로 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2) 두 번째는 적극적인 문제입니다.

이들의 문제는 “하나님을 반역하는 도시”를 건설하려고 한 것입니다. 4절,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본문을 보시면, 세 가지 구체적인 반역이 나옵니다.

(a) 바벨탑의 높이를 하늘에 닿게 하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고유한 영역을 침입해 들어가겠다는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땅은 사람이 사는 곳이고, 하늘은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이곳까지 닿도록 탑을 쌓겠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영역까지 도달하겠다는 것입니다. 고든 웬함 “인간들이 하늘에 닿은 성전을 지어 하나님의 영역에 침범하려고 시도하면서 이제 인간의 죄성은 모든 한계를 와해시켜 버렸다.” 하지만, 성경은 무엇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인간의 관점에서 봤을 때는 하늘에 닿는 탑을 쌓았다고 말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봤을 때는 그것을 보려고 내려오셔야만 하셨습니다. 5절,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7절,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인간이 하나님의 영역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착각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b) 자신의 이름을 내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고유한 특권을 침입해 들어가겠다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공통적으로 반복되는 것은 이름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이나 물건에게 지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세기의 흐름입니다. 창 1:5,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 2:20,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창 4:25,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그런데, 시날 평지에서 사람들이 도모하는 것은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내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명백한 월권행위입니다. 오늘 본문 말미에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셔서 이 사람들을 모두 흩으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셈의 족보입니다. 셈의 족보가 여기서 등장하는 이유는 셈의 족보로부터 아브라함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첫 말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창 12:1~2,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무슨 말씀입니까? 사람의 이름을 창대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고유한 특권에 속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아브람’은 ‘높은 아버지’에서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버지’로 바꾸어집니다. 그래서 스스로 이름을 내려고 했던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의 이름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이름을 창대하게 하신 아브라함은 기독교와 유대교뿐만 아니라 이슬람교까지 믿음의 아버지로 높임을 받는 것입니다.

(c)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고의로 어기겠다는 것입니다. 처음 창조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노아 홍수 이후, 재 창조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창 9:1,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종합해 보면, 시날 평지에서 사람들이 한 일은 하나님을 반역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도시를 건설하려고 한 것입니다.

III. 결론

마지막으로, 이 부분만 설명해 드리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창세기를 읽으면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창세기의 첫 독자,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관점에서 창세기를 읽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떤 교훈을 주었을까요? 시드니 그레다이누스 “이스라엘이 이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은 그들이 언약의 땅으로 진입하기 직전이었다. 이 과정에서 몇 개의 도시 국가 (바벨과 비슷한)와 마주하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은 주변의 도시 국가들을 본떠서 스스로 도시국가 수립을 시도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무슨 말입니까? 오늘 본문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에 들어가서 어떤 나라를 세워야 할지에 대한 교훈을 주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 세상 나라들처럼 하나님을 무시하거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나라를 건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의 나라를 세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인정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은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일년 동안 어떤 가정을 세워나갔습니까? 조금 길게 본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일평생 어떤 가정을 이루었습니까? 혹시 하나님이 없어도 되는 가정을 이룬 것은 아닙니까? 세상에서 성공하면 되고, 세상에서 건강하면 되고, 세상에서 안전하면 된다고 자녀들에게 가르친 것은 아닙니까? 아니면, 세상의 풍조를 따르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야 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까? 다가오는 2020년은 어떤 가정을 이루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 없는 성공, 건강, 안전입니까? 아니면,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의 삶입니까? 주님께서 밝아오는 새해에는 성도님 개인과 가정에 그리고 우리 교회와 조국과 이 나라 위에 크신 은혜를 베풀어 주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