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설교] 사라의 죽음 그리고 약속의 땅 – 020920

창세기 강해 (13) – 사라의 죽음 그리고 약속의 땅
창 23:1~15

I. 서론

“88991234”라는 말이 있습니다. “팔팔 하게 99세까지 살다가, 하루 이틀 사흘 앓다가 죽는다(4)는 뜻입니다.” 여기 모이신 모든 성도님들에게 “88991234”의 축복이 있으시기를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우리는 앞으로 20년 이상은 다 살게 되겠지만, 세상의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지 못할 것 같습니다. CIA 와 OECD 자료를 보니, 다음과 같은 인간의 기대 수명에 관한 통계가 나와 있었습니다. (소수점은 반올림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2020년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평균 83세입니다. (남성: 79세 / 여성: 85세) 2020년 미국인의 기대수명은 평균 79세입니다. (남성: 76세 / 여성: 81세) 미국인의 기대수명이 한국인 보다 4세나 낮은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이 있습니다. 미국인 중에서도 인종 별로 살펴 봤을 때는 이 통계가 뒤집어 집니다. 미국인 중에서 가장 기대 수명이 낮은 인종은 African-American인데, 75세입니다. 미국인 평균 기대 수명보다 4세나 낮은 것입니다. 그런데, 미국인 중에서 가장 기대 수명이 높은 인종은 Asian-American인데, 86세입니다. 미국인 평균 기대 수명보다 7세나 높고, 한국에 사는 한국인보다도 3세나 높습니다. 그러니까, 한국에 있는 한국인보다 미국에 있는 한국인이 3세나 평균 수명이 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99세까지 살거니까 상관이 없지만, 세상 사람들을 봤을 때, 오늘 설교는 상당히 중요한 설교가 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이 “죽음”에 관해서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롤랜트 슐츠라는 분이 2018년도에 <죽음의 에티켓>이라는 책을 썼는데, 이 책이 “독일 올해의 르포상”, “아마존 올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으로 선정이 되었습니다. 이 책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인간은 평생 자신이 반드시 죽는다는 걸 부인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로 생각하는 존재가 되었다”고 말이죠. 사실 죽음은 너무 멀리 있었습니다. 그건 언제나 다른 사람의 죽음일 뿐, 단 한 번도 당신의 죽음이었던 적이 없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당신은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너무나도 확실한 사실을 보지 않고 회피해 왔습니다. 우리 모두가 죽어 간다는 사실 말입니다.” 오늘은 본문을 중심으로 모두가 회피하고 싶은 “죽음”에 대해서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본문의 개요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창세기 23장부터 25장까지는 이스라엘 제1대 족장 아브라함의 시대가 저물고, 제2대 족장 이삭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있는 창세기 23장에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죽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24장에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결혼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25장에는 아브라함이 죽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렇게 한 세대가 가고, 다음 세대가 오면서 아브라함의 시대가 저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 시작인 것입니다. 1절,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 이것이 곧 사라가 누린 햇수라” 사라가 127세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 본문은 성경에서 유일하게 여자가 죽은 나이를 언급하는 본문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사라 말고는 여성들의 죽은 나이가 언급되고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 여러 군데서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이 늙어서 이삭을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사라가 127세에 죽은 것은 분명히 노년의 죽음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잘 보시면, 창세기 저자의 초점은 단순히 사라의 죽음에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라의 죽음에 대해서는 1절과 2절, 단 두 구절에서만 언급하고 있고, 3절부터 20절까지는 사라의 죽음을 계기로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의 일부를 산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라의 죽음과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의 일부를 샀다는 것이 무슨 연관이 있을까요? 이 질문에 답을 하는 것이 오늘 본문 말씀을 해석하는 열쇠입니다. 세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첫째는 창세기 23장 안에서의 본문의 의미, 둘째는 창세기 전체에서의 본문의 의미, 마지막은 성경 전체에서의 본문의 의미로 살펴보겠습니다. 이것을 좁은 의미, 중간 의미, 넓은 의미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II. 본론

1. 먼저, 좁은 의미, 창세기 23장에서의 본문의 의미입니다.

1~4절,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 이것이 곧 사라가 누린 햇수라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 그 시신 앞에서 일어나 나가서 헷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할 소유지를 주어 내가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시오”

1) 사라가 죽은 후, 아브라함이 한 첫 번째 행동은 슬퍼하며 애통한 것입니다. 2절,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 간혹 그리스도인 중에서도 가족이나 친구를 잃은 분에게 “울지 말라”는 말을 하는 분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저의는 “고인이 좋은 곳, 천국에 갔는데, 왜 슬프게 우느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이 없어서 우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간 것을 믿지 못해서 우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더 이상 사랑하는 사람과 이야기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을 수가 없기 때문에 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분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위로는 조언을 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함께 있어 주는 것이고, 함께 울어 주는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2) 사라가 죽은 후, 아브라함이 한 두 번째 행동은 일어나서 매장지를 구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죽음을 슬퍼했지만, 그렇다고 무한정으로 슬퍼하고 애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정 기간, 애도한 다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한 것입니다. 이 두 가지에 대한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본문을 보시면, 아브라함이 사라의 매장지를 구한 내용이 3절부터 20절까지 나옵니다. 간혹 매장 방식에 관해서 질문을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고인을 땅에 묻어야 합니까? 아니면, 화장을 해도 됩니까? 미국이라는 나라는 땅이 넓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이러한 문제가 크게 대두되지 않지만, 한국은 땅이 좁기 때문에 심각한 문제입니다. 성경적으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을까요?

어거스틴이 나이가 들었을 때, 어떤 목회자로부터 목회에 대한 실제적 질문을 받았습니다. 문의한 목회자의 성도 가운데 한 남자가 죽었는데, 슬픔에 빠진 그의 어머니가 죽은 아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성인의 묘가 있는 어느 교회의 건물에 그 아들을 묻어주길 부탁했습니다. 이 때,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답변을 해주었습니다. “죽은 자의 육체를 보살피며 물리적 매장 방식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인간이 해야 할 직무”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자들이 그의 육신을 십자가로부터 취하여 무덤 안에 엄숙히 안장했던 것처럼 우리도 죽은 이의 육체를 보살펴야 합니다. 하지만 죽은 육체에 일어나는 일에 대한 마술적 관점은 배격해야 합니다. 성자로부터 1미터 떨어진 곳에 묻힌들 그 누구도 영적 삼투압에 의해 거룩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매장 방식이 어떤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의 육체가 박해자에 의해 더럽혀졌으며 사자에게 던져졌고 칼로 절단되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피는 물처럼 예루살렘 주변을 따라 흘렀으며 그들을 묻어줄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비록 적절하고 거룩한 방법으로 묻히지 못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주님 보시기에 소중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의심할 여지없이 훌륭한 장례식을 치렀겠지만, 천사가 아브라함의 품으로 인도한 것은 상처로 뒤덮인 육신을 가졌던 거지 나사로였습니다.”

어거스틴은 두 가지 말을 한 것입니다. 1) 고인의 육체를 보살피는 것은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직무”라는 것입니다. 지금이야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어거스틴이 살던 당시만 해도 로마 문화에서는 인간의 육체를 귀하게 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로마 사회는 헬라 철학의 이원론의 영향을 받아서 영혼은 선한 것이고, 육체는 악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토마스 롱 교수님의 설명을 들어보겠습니다. “로마인들에게 인간의 육체란, 현자 플라톤이 가르친 대로 더럽혀진 그릇, 즉 육체로부터의 놓임을 갈망하는 순수한 영혼에게 덫과도 같은 감옥이었다. 육체와 관련하여 로마인들을 가장 어리둥절하게 만든 점은 이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장의사의 역할을 자처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형제들의 시신을 매장하는 일에 자원했을 뿐 아니라 아무데나 아무런 의식절차 없이 내버려진 가난한 로마인들의 시신까지도 보살펴 주었다. 신학자 마가렛 마일스 (Margaret R. Miles)가 지적하듯이 “로마 사회에서 시체는 저주받은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죽은 자의 시신을 보살피는 이해 못할 그리스도인들의 행동은 지성적이고 정신이 똑바로 박힌 사람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짓이요, “빛을 피해 도망치는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교양있는 로마인들 눈에, 이 미개한 그리스도인들은 “육체는 무시되고 경시되며 조롱받아야 하는 것인 반면, 존경받고 육성되어야 할 것은 정신이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함”으로 인해 잘못된 길에 들어선 것으로 보였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아브라함이 직접 매장지를 사서, 사라의 시신을 잘 모신 것은 지극히 성경적인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2) 어거스틴이 두 번째로 한 말은 미신적인 것을 배격한 것입니다. 비싼 장례식이나 좋은 매장지가 고인의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예로,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부자는 분명히 비싼 장례식과 좋은 매장지에 시신이 안치되었지만, 그의 영혼은 지옥에 갔다는 것입니다. 그에 반하여, 나사로는 비싼 장례식도 치르지 못했고, 좋은 매장지에 시신이 안장되지도 못했지만, 천국에 갔다는 것입니다. 매장 방식에 관한 질문에 결론을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고인의 시신을 귀중하게 생각하고, 가능하면 땅에 매장을 하는 쪽을 선택하십시오. 그러나, 부득이하게 화장을 하게 되더라도 그 고인의 영혼이 천국 가는 것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2. 둘째, 중간 의미, 창세기 전체에서의 본문의 의미입니다.

7, 12절, “아브라함이 일어나 그 땅 주민 헷 족속을 향하여 몸을 굽히고” “아브라함이 이에 그 땅의 백성 앞에서 몸을 굽히고”

본문을 보시면, 아브라함이 두 번이나 몸을 굽혀서 가나안 땅의 백성들 앞에서 저자세를 취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행동한 이유는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사라의 시신을 매장할 곳을 “사기” 위해서입니다. 처음에,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 주민 헷 족속 사람들에게 사라의 시신을 매장할 곳이 필요하다고 요청했습니다. 4절,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할 소유지를 주어 내가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시오” 그러자, 헷 족속 사람들이 그냥 매장지를 주겠다고 대답했습니다. 6절, “내 주여 들으소서 당신은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이시니 우리 묘실 중에서 좋은 것을 택하여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우리 중에서 자기 묘실에 당신의 죽은 자 장사함을 금할 자가 없으리이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미리 봐 두었던 에브론이 소유하고 있던 막벨라 굴을 자신에게 팔라고 요청했습니다. 8~9절, “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로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는 일이 당신들의 뜻일진대 내 말을 듣고 나를 위하여 소할의 아들 에브론에게 구하여 그가 그의 밭머리에 있는 그의 막벨라굴을 내게 주도록 하되 충분한 대가를 받고 그 굴을 내게 주어 당신들 중에서 매장할 소유지가 되게 하기를 원하노라 하매” 그러자, 에브론이 아브라함에게 막벨라 굴과 그 굴이 속해 있는 밭까지 그냥 사용하시라고 대답했습니다. 11절, “내 주여 그리 마시고 내 말을 들으소서 내가 그 밭을 당신에게 드리고 그 속의 굴도 내가 당신에게 드리되 내가 내 동족 앞에서 당신에게 드리오니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그러자, 아브라함이 에브론에게 그 밭을 자신에게 팔라고 다시 요청을 했습니다. 13절, “그 땅의 백성이 듣는 데서 에브론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합당히 여기면 청하건대 내 말을 들으시오 내가 그 밭 값을 당신에게 주리니 당신은 내게서 받으시오 내가 나의 죽은 자를 거기 장사하겠노라” 그러자, 에브론이 그 밭과 막벨라 굴 값으로 은 사백 세겔을 아브라함에게 제시했습니다. 15절, “내 주여 내 말을 들으소서 땅 값은 은 사백 세겔이나 그것이 나와 당신 사이에 무슨 문제가 되리이까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그런데, 에브론이 아브라함에게 제시한 은 사백 세겔은 터무니 없이 비싼 값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막벨라 굴을 사기 위해 에브론이 제시한 값을 흥정할 수도 있었고, 그 제시한 값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도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을까요? 16~18절, “아브라함이 에브론의 말을 따라 에브론이 헷 족속이 듣는 데서 말한 대로 상인이 통용하는 은 사백 세겔을 달아 에브론에게 주었더니 마므레 앞 막벨라에 있는 에브론의 밭 곧 그 밭과 거기에 속한 굴과 그 밭과 그 주위에 둘린 모든 나무가 성 문에 들어온 모든 헷 족속이 보는 데서 아브라함의 소유로 확정된지라” 아브라함은 흥정하지 않고, 곧바로 은 사백 세겔을 달아 주었습니다. 그 이유를 시드니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작은 밭과 굴 하나 값으로 은 사백 세겔씩이나? 사백 세겔은 은 45킬로그램 이상이 될 것이다. 다윗 왕은 아라우나로부터 성전 터를 사들이면서 400세겔의 8분의 1인 50세겔을 지불했다. 분명히, 아브라함은 에브론이 자신이 매장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악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런 터무니 없이 비싼 가격에 그 땅을 살 것인가? 그는 관습대로 가격을 일정부분 깎아달라고 흥정을 할 것인가? 하지만 흥정을 하면, 그건 에브론에게 이 매매에서 빠져나갈 기회를 주게 될 것이다.”

왜 창세기 저자인 모세는 이렇게 땅 사는 이야기를 길게 기록했을까요? 우리에게 부동산 사는 방법을 가르쳐 주려고 했던 것도 아닐 텐데 말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왜 이렇게 터무니 없이 비싼 값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땅에 있는 헤브론 땅을 샀을까요? 만약 아브라함이 단순하게 사라의 매장지만을 염두에 두었다면, 헷 족속의 제의나, 에브론의 제의를 따라서 공짜로 막벨라 굴을 받아서 매장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막벨라 굴은 법적으로 아브라함의 소유가 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가나안인의 소유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의 일부이긴 하지만, 최초로 가나안 땅의 실소유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처음부터 하셨던 약속이 드디어 실행된 사건이었습니다. 창세기 12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13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시겠다고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창 13:14~15,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그 약속이 사라의 죽음을 계기로 성취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문화에서는 고인이 죽으면, 그 시체를 고향 땅에 묻었습니다. 알렌 로스, “당시에는 죽은 사람을 어디에 매장하느냐고 중요했다. 매장은 고향 땅에서 이루어져야 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그 지역 사람들에게 낯선 이방인이었지만, 그의 희망은 그 땅에 있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었던 것입니다. “가나안 땅이 너와 네 자손에게 영원한 기업이 되리라” 이 말씀은 창세기의 첫 독자인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떤 메시지가 되었을까요?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자신에게 주신 땅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우리에게는 어떤 교훈을 줄까요?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을 믿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은 어디입니까? 솔리비타입니까? 리유니언입니까? 뉴욕 맨하탄입니까? 한국 서울입니까? 이런 것들은 여러분이 앞으로 20년 동안, 거주할 천막과 같은 곳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약속의 땅은 천국입니다.

3. 마지막으로, 넓은 의미, 성경 전체에서의 본문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라의 죽음은 성경 전체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사라의 죽음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죽음이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성도의 죽음이었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사라가 천국을 사모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히 11: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여기서 “그들”이란 앞 문맥을 봤을 때, “아브라함과 사라”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과 사라가 이 세상에 있을 동안, 천국을 사모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 천국에 우리의 시민권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빌 3: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원래 이 세상 사람인데, 천국의 시민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시민권은 원래 천국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밴스 하브너 목사님의 설명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여러분은 천국에 가려고 노력하는 이 세상의 시민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을 통과하여 (천국으로) 나아가는 천국의 시민입니다.” (If you are a Christian, you are not a citizen of this world trying to get to heaven; you are a citizen of heaven making your way through this world.)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자신들이 “나그네”임을 알고 있으며, 장차 본향으로 돌아갈 것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와싱턴사귐의교회을 담임하시는 김영봉 목사님의 설명을 들어 보겠습니다. “인간은 본질상 나그네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 세상에 잠시 살다가 떠나갑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시 90:10). 잘 살아야 80년이며, 그것도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갑니다. 세상을 쥐락펴락하던 사람도 죽고 나면, 흔적도 보이지 않습니다. 인생 수십 년이 꿈결만 같습니다. 인생의 본질이 나그네인 이유는 ‘영원한 고향’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사실을 인정하고, 어떤 사람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믿음이란 바로, 이 사실을 인정하고 믿는 것입니다.” 인간은 본질상 나그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에서는 죽음을 “소멸”이라고 말하지 않고, “떠남”이라고 말합니다. 잠시 이 땅에서 살다가 영원한 천국, 본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본인의 죽음을 떠남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딤후 4:6,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4세기에 살았던 요한 크리소스톰이라는 주교가 있습니다. 이 분은 로마의 제2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총 책임자였습니다. 이 분이 워낙 설교를 잘 해서 이 분의 별명이 “황금의 입”입니다. 이분이 인생을 “연극”이라는 단어로 설명했습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둘 다 죽는 그날까지 부자는 행복해 보였고 빈자 나사로는 불행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죽음이 찾아왔을 때, 부자의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죽음을 계기로 부자와 나사로와의 관계가 변한 것입니다. 연극이 끝나면, 배우들은 분장을 지우고 이전의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죽음이 오고 ‘현생의 연극’이 끝나면, 그 때 우리 모두는 가난과 부의 분장을 지우고, 실제적인 우리의 모습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행실에 따라, 누가 진정한 부자이며, 누가 빈자인지, 누가 영예를 입고, 누가 영광을 잃었는지 판단 받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한 편의 연극과 같다는 것입니다. 한 편의 연극이 끝나면, 우리 모두가 분장을 지우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좋은 배우는 연극을 할 때, 최선을 다해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할 것입니다. 하지만, 연극에서의 역할이 자신의 본 모습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역할에 최선을 다합시다. 하지만, 이 연극이 끝날 때, 우리의 본향으로 돌아갈 것도 잊지 마십시다.

III. 결론

마지막으로 이 말씀만 드리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스페인의 초현실주의 화가인 파블로 피카소는 자신의 생의 마지막을 과학 연구에 쏟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수명을 150세까지 연장해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의 기대대로, 수명이 150세까지 연장되었다 해도 그는 만족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수명을 200세까지 늘리지 못했을 테니까 말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히 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사람이 절대로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죽음을 잘 준비하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죽음을 잘 준비하는 방법일까요? 기독교에서 말하는 개념은 아주 간단합니다. 천국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아버지가 되도록 하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아버지가 계신 하늘 나라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방법은 단 한 가지입니다. 바로,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우리도 이 세상을 떠날 때, 예수님께서 하신 기도를 드릴 수가 있게 됩니다. 김영봉 목사님의 설명을 마지막으로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라고 기도하고는 마지막 숨을 거두셨습니다. 이 기도는 유대인들의 취침 기도입니다. 잠을 자는 동안에 자신의 영혼이 어찌될지 모르니, 내일 아침에 일어날 때까지 영혼을 지켜 달라는 기도입니다. 주님은 마치 한잠 자고 일어나실 것처럼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그분에게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잠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아버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왜 죽음을 걱정하십니까? 천국의 주인이 우리 아버지이신데 말입니다. 우리가 한잠 자고 나서 일어나면, 그곳은 천국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직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없으십니까? 그렇다면, 왜 망설이십니까? 성경에서 분명하게 그 방법을 말씀해 주고 있는데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예수님을 여러분의 삶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십시오. 그리하면,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