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설교] 아브라함의 중보 기도 – 012620

창세기 강해 (11) – 아브라함의 중보 기도
창 18:20~33

I. 서론

오늘 본문은 성경에 최초로 나오는 중보 기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중보 기도”라는 단어가 생소하신 분이 계실 것 같습니다. 중보기도는 기도의 한 종류입니다. 중보 기도를 가장 간단히 말씀 드리면,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기도에 대해서 말할 때, 기억하면 좋은 명언이 하나 있습니다. 아도니람 저드슨 고든 (Adoniram Judson Gordon)이라는 목사님이 한 말입니다. 이 분은 매사추세츠 해밀턴에 있는 고든 콘웰 신학교를 설립한 분입니다. (정확히는 고든 콘웰 신학교 전신) “You can do more than pray after you have prayed, but you cannot do more than pray until you have prayed.” (기도한 후에는 기도하는 것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도하기까지는 기도하는 것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없다.) 왜 그럴까요? 기도하지 않으며, 우리의 능력만 나타나지만, 기도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중보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중보 기도를 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우리의 기도를 통하여 나타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 모두 중보 기도자로서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기를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II. 본론

1. 첫째, 중보 기도자는 무너진 곳을 막아 서서 기도하는 자입니다.

중보 기도자에 대한 가장 좋은 그림 중 하나는 에스겔서 22장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겔 22:29~31, “이 땅 백성은 포악하고 강탈을 일삼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압제하고 나그네를 부당하게 학대하였으므로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에서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 내가 내 분노를 그들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들 행위대로 그들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남 유다가 멸망한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일차적으로 유다가 멸망한 이유는 29절에 나와 있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포악하고 강탈을 일삼았습니다.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압제했으며, 나그네를 부당하게 학대했습니다. 이것이 유다가 멸망한 이유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보시면, 이것이 일차적인 이유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30~31절,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에서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 내가 내 분노를 그들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들 행위대로 그들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께서 유다를 위해 성을 쌓고 성의 무너진 데를 막아 서는 사람을 찾다가 찾지 못하였기 때문에 유다를 멸망시켰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유다를 위해 중보 기도하는 자를 찾지 못해서 유다를 멸망시켰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보 기도자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을 보게 됩니다.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하나님께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찾다가 찾지 못해서 결국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졌다는 것입니다.” (이동원)

오늘 본문도 정확하게 이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일차적인 이유는 그들의 죄악 때문입니다. 20~21절,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죄악이 심히 무거웠다는 것이 일차적인 이유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부르짖음이 크다”는 것입니다. 어떤 부르짖음을 말할까요?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 목사님이 현대 사회의 부르짖음에 대해서 설명을 했습니다. 이 설명을 들어보면, 소돔과 고모라에서 말하는 부르짖음이 어떤 부르짖음인지 감을 찾을 수 있습니다. “들어보십시오! 당신의 마음 속에 저 부르짖음이 들리지 않습니까? 나는 술에 취한 아버지에게 구타당하고 있는 가엾고, 상처받고, 겁먹은 한 아이의 부르짖음을 듣습니다. 또 다른 부르짖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 노인이 거리의 젊은 갱단에게 폭행을 당하며 외치는 부르짖음입니다. 나는 그들이 그의 얼굴과 양 어깨 주변에 폭행을 가해 그가 고통으로 부르짖는 소리를 듣습니다. 버려진 차 안에서 강간을 당하고 있는 한 십대 소녀의 부르짖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남편에게 버림받은 한 아내의 부르짖음도 있습니다. 나는 인간성을 빼앗는 복지 제도의 함정에 빠져 그것을 포기한 한 파산자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습니다. 나는 죄악의 쾌락이 부르짖는 소리도 듣습니다. 우리가 사는 도시의 얼굴에 상처를 내는 수천 개의 술집에서 나는 소란한 소리, 창녀들과 그들의 포주들이 외치는 소리, 마약 중독자들의 부르짖음, 적을 패배시키거나 경쟁자를 몰락시킬 수 있었던 자들의 교만한 부르짖음의 소리를 듣습니다.” 이런 현대 사회의 부르짖음 때문에,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미국을 심판하지 않으신다면, 소돔과 고모라에게 사과하셔야 한다.”

소돔과 고모라에도 같은 종류의 부르짖음이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롯을 찾아온 두 천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롯이 소돔과 고모라를 찾아온 두 천사를 자신의 집으로 영접하자, 온 도시의 남자들이 밤에 찾아와서 강제로 동성애를 하겠다고 고함을 지르고, 롯의 대문을 부수려고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대표적인 사건을 통하여 당시 소돔과 고모라가 얼마나 타락했으며 그 타락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울부짖었는지를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이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을 잘 보시면,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는 것을 주춤거리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중보 기도자가 나타나서 소돔과 고모라의 무너진 곳을 막아 섰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이었습니다. 23~25절,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의 무너진 곳을 막아서서 하나님께 세 가지 질문을 하면서 중보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요청을 들어 주셨습니다. 26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만일 소돔 성읍 가운데에서 의인 오십 명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역을 용서하리라”

물론 본문을 더 읽어 가다보면, 이 숫자가 50명에서 10명까지 줄어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째든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의 무너진 곳을 막아 서서 중보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다가 보면, 이런 예는 참 많이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를 하나만 더 들어 보겠습니다. 지금 함께 읽을 본문은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산에 올라갔다가 생각보다 늦게 내려오자,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한 죄악입니다.

출 32:1,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4,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7~10,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예배하며 그것에게 제물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모세가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듣고, 그 무너진 곳을 막아 서서 중보 기도를 드립니다. 11~13, “모세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하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주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모세가 이렇게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14,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중보 기도자는 이렇게 무너진 곳을 막아서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무너진 곳은 꼭 죄악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무너진 자녀의 신앙, 무너진 부모님의 건강, 무너진 나라의 리더십. 이 모든 것을 위해 우리가 하나님께 중보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무너진 곳을 찾아 그 무너진 곳을 위해 기도합시다. 그래서 우리의 중보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치유의 역사가 우리 가정과 우리 교회와 우리 나라와 온 열방 가운데 나타나도록 하십시다.

2. 둘째, 중보 기도자는 겸손하게 기도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 중보 기도할 자격이 있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무슨 자격으로 하나님께 무너진 곳을 위해 중보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그런 자격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아브라함도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다음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27~28절,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 오십 의인 중에 오 명이 부족하다면 그 오 명이 부족함으로 말미암아 온 성읍을 멸하시리이까 이르시되 내가 거기서 사십오 명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저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님께 아뢰나이다.” 자신이 입김 한 번 “후” 불면, 날아가 버리는 티끌이나 재와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학적으로 보면,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중보”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습니다. “중보란 예수 그리스도가 한 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인류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고 죽은 일을 이른다.”

여기서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중보의 사역은 그리스도의 3중직에서 어느 직분에 해당할까요? 그리스도의 3중직은 왕, 제사장, 선지자입니다. 중보 사역은 제사장의 사역입니다. 왕은 다스리는 사역이고, 선지자는 가르치는 사역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하나님과 사람 사에서 중보자가 되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보시면, 그리스도인도 제사장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벧전 2장 9절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한 부분입니다. 다른 구절보다 조금 더 큰 소리로 읽어 보겠습니다. 벧전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우리가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제사장이기 때문에 예수님처럼 하나님과 타인 사이에서 중보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만이 가지는 고유한 특권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타인을 위한 중보 기도의 특권을 사용하고 있습니까?

사회정책학 (Social Policy) 분야 교수인 John McKnight 교수가 쓴 라는 책에 보면, 흥미로운 내용이 있습니다. “감옥은 당신의 자유를 빼앗아 가겠다는 사회적 결정이다. 감옥은 우리가 당신에게 당신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장소이다. 당신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가할 수 있는 최악의 형벌이다. 자유의 반대는 당신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감옥 안에서, 우리는 당신이 살 수 있도록 해 준다. 먹을 것을 주고, 의료를 제공한다. 하지만, 우리는 당신이 당신의 능력을 발휘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감옥이라는 곳은 사람의 자유를 빼앗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자유냐면, 타인을 위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유를 빼앗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감옥에 갇힌 사람은 사회에서 전혀 쓸모가 없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아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만을 위해 기도하고, 우리 자신만을 위해 시간과 물질을 사용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스스로 감옥에 가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중보 기도란 자아라는 감옥에서 탈출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Dietrich Bonhoeffer) 목사님은 중보 기도에 대해서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관점으로 말했습니다. “중보 기도란 개인과 공동체가 날마다 스스로를 정화하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하는 목욕과 같은 것이다.” 중보기도는 영혼의 목욕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반대로 말하면, 기도를 아예 하지 않거나 자신만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영혼에 때가 잔뜩 끼어있다는 것입니다. 혹시 몇 주 동안 목욕하지 않은 홈러스 옆을 지나가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아무도 그 사람 옆에 있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씻지 않는 육체의 냄새가 나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목욕을 하지 않은 사람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 있다면, 자신만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에게서는 씻지 않는 영혼의 냄새가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중보 기도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습니다. “중보기도는 결국 나를 살리는 기도이다.” 그러므로, 중보 기도하는 사람은 겸손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중보 기도자는 믿음으로 기도하는 자입니다.

29~32절, “아브라함이 또 아뢰어 이르되 거기서 사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사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주여 노하지 마시옵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삼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거기서 삼십 명을 찾으면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내가 감히 내 주께 아뢰나이다 거기서 이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이십 명으로 말미암아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 거기서 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은 총 여섯 번 기도했습니다. 숫자도 점차 줄어들었습니다. 50명, 45명, 40명, 30명, 20명, 10명. 아브라함이 이렇게 여섯 번이나 기도할 수 있었던 근거는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신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첫 번째 “오십 명”을 놓고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고 가정해 봅시다. “야, 이 놈아. 네 귀에는 소돔과 고모라에서 부르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노인들이 폭행을 당하고, 어린 소녀들이 강간 당하고, 부자가 가난한 자를 착취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소돔과 고모라는 내가 진작에 멸망시켜야 했었는데, 지금까지 참았느니라. 다시는 이 문제로 기도하지 말거라.” 만약,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면, 아브라함은 더 이상 기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응답해 주셨습니다. 29절, “사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30절, “삼십 명을 찾으면,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31절, “이십 명으로 말미암아,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32절,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실 뿐 아니라, 그 기도에 기꺼이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계속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중보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기도에 기꺼이 응답해 주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담대히 기도할 수 있고 지속적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설명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 말씀만 드리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성경에 자세히 보면, 어떤 내용을 가지고 “중보 기도하라”는 명령이 나옵니다. 대표적인 세 군데를 찾아 보겠습니다. 약 5:16,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육체의 병든 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히 13:18,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교회 사역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딤전 2:2,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정치 지도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종합하면, 이렇습니다. 육체의 병든 자를 위해 기도하라. / 교회 사역자을 위해 기도하라. / 정치 지도자를 위해 기도하라.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들을 위해 중보 기도하라는 명령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우리가 이런 문제를 놓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명령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병든 자는 일차적으로 육체적으로 병든 자를 의미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모든 연약한 자를 다 총칭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육체적으로 아픈 분, 영적으로 신앙을 잃은 분, 사업에서 실패한 분, 가족이나 친구를 잃은 분. 이런 모든 연약한 분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 사역자란 일차적으로 교회의 목회자나 선교사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모든 교회의 직분자들을 총칭합니다. 그리고, 모든 선교 기관에서 사역하는 분들을 총칭합니다.

요즘 우리가 옥한흠 목사님의 서적을 읽고 있는데, 옥목사님의 말씀 중에서 여러분에게 도움이 될만한 것 같아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사랑의 교회를 다닐 당시, 사랑의 교회는 주일에 4부 예배를 드렸습니다. 1부는 일찍 예배를 드리고 싶은 분들이 나오셨고, 2부는 목회자와 평신도 사역자들이 많이 나오셨고, 3부는 일반 성도님들이 많이 나오셨고, 4부는 젊은이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옥한흠 목사님이 3부 예배 보다 2부 예배, 즉 사역자들이 많이 나오는 예배를 드릴 때, 설교하면서 영적으로 많은 힘을 얻고 있다는 느낌을 가진다는 말씀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3부 예배에 나오는 일반 성도님들은 옥목사가 설교를 잘하는지 못하는지 판단하면서 설교를 듣습니다. 하지만, 2부 예배에 나오는 사역자들은 옥목사의 사역과 설교를 위해 중보 기도하면서 설교를 듣습니다. 그래서, 2부 예배 때 설교를 하면, 제가 오히려 영적으로 강한 힘을 얻습니다. 여러분도 제 설교를 들으실 때, 판단하시기 보다 중보 기도하면서 설교를 들으시지요? 여러분이 어디에 계시든, 그런 마음으로 설교를 들으시면, 목회자뿐만 아니라 여러분에게도 복이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지도자를 위해 기도하는 이유는 지도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라고 설명을 합니다. 미국에 있는 우리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위해 기도해야 하고, 한국에 마음이 있는 분들은 문재인 대통령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비록 일 중에 정치적으로 트럼프 대통령이나 문재인 대통령의 정책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들을 비판하기 보다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정치를 잘 해야지 우리와 우리의 가족이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보 기도는 타인을 위한 기도이지만, 실제로는 나를 살리는 기도인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 살아가면서, 우리 주위를 둘러 보고, 뉴스를 접할 때마다 중보 기도합시다. 우리의 중보 기도를 통하여 주님께서 큰 영광 받으시는 복된 한 주간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