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설교]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 – 020220

창세기 강해 (12) –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
창 22:1~14

I. 서론

오늘 본문은 구약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고든 웬함 교수는 오늘 본문을 두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삭을 희생제사로 바치라는 잔인한 명령,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이 희생 장소로 올라가는 그 고독한 길에서 느끼는 애절함, 이삭을 묶어서 제단 위에 눕히고 마지막 순간에 하늘로부터 저지당하기까지의 그 고통스러운 과정이 이 이야기를 세계 문학에서 가장 널리 전해 오는 이야기들의 하나가 되게 하였다.” 오늘 본문이 유명하고,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본문이긴 하지만, 오늘 본문을 해석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에 하나님의 명령을 들은 후, 아브라함의 마음이나 아브라함이 한 생각에 대해서는 설명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오직 아브라함의 행동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 본문의 전후 문맥, 그리고, 오늘 본문과 관련된 신약 성경의 자료를 모두 활용해서 본문을 해석하고 적용해야 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의 개요에 대해서 살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1절,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그리고, 오늘 본문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는 하나님은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이야기의 결론에 해당합니다. 14절,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먼저 “여호와 이레”의 정확한 뜻에 대해서 설명을 드린 후, 본문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여호와 이레’는 우리가 잘 알듯이 “하나님께서 준비하실 것이다. /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실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영어로 말씀 드리면, “God will provide.”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이레 (yireh)”의 원어의 뜻은 조금 다릅니다. 원어의 뜻은 “보다” 영어로, “see”입니다.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두 개 들어 드리겠습니다. 창 1:3~4,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보시기에”가 바로 히브리어 “이레 (yireh)”인 것입니다. 삼상 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보거니와”와 “보느니라”가 바로 히브리어 “이레 (yireh)”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히브리어 “이레”는 사람이나 사물의 외적인 것을 보는 것뿐만 아니라 사람의 내적인 것을 보는 것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화 이레”를 종합해서 해석하면,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인가를 준비해 주시기 위해서 우리의 상황과 우리의 마음을 먼저 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 드리면, 이해하기 쉬우실 것 같습니다. LA에서 목회하시다가 은퇴한 목사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목사님이 학창 시절에 한국에서 미국으로 유학을 가려고 했습니다. 제일 힘든 일이 미국 대사관에서 비자를 받는 일이었습니다. 몇 번 인터뷰를 했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거절을 당했습니다. 한번은 낙심이 되어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나던 미국 여성 둘이 자기 앞을 지나가다가 영어를 할 줄 아느냐고 물어봤다고 합니다. 얼떨결에 “Yes”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덕수궁에 있는 옛날 그림을 봤는데, 그 그림이 무슨 그림인지 설명을 해 달라고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부탁을 받았으니 설명은 해 주어야겠는데, 영어로 설명할 실력은 안되어서 한국말로 열심히 설명을 해 주었다고 합니다. ‘설명을 하는 것은 내 책임이고, 알아듣는 것은 그쪽 책임’이라는 생각으로 말입니다. 그러고 나서 이틀 후, 비자를 받기 위해서 미국 대사관에 인터뷰를 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성들이 먼저 목사님을 알아보고 인사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어떤 일로 오셨어요?” “아~ 비자를 받으러 왔습니다.” “그러세요? 제가 도와주겠습니다.” 이 말을 하고, 목사님을 비자 담당자에게 데리고 가더니 이 사람은 영어를 잘 하니까 미국에 보내줘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설명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덕분에 미국 비자를 받아서, 미국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고, LA에서 목회를 잘 하다가 은퇴를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목사님을 위해 “미국 대사관 직원 두 명”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이것을 여호와 이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미리 준비해 주실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목사님의 상황과 마음을 미리 보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지나온 삶 가운데서도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경험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올 한 해 동안에도 여호와 이레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 삶 가운데, 그리고 우리 자녀들의 삶 가운데 늘 함께 하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이제 본문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II. 본론

1. 첫째, 오늘 본문에서 명확하게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1~2절,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무엇을 시험하신 사건일까요? 결론부터 말씀 드리면, 사랑과 믿음에 관한 시험이었습니다.

1) 먼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사랑하는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사랑”이라는 단어가 성경 최초로 사용된 본문입니다. 성경에서 그렇게 강조하는 “사랑”이 창세기 22장까지 오도록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은 것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히브리어 “아하브(Ahav)”가 나중에 헬라어에서 “아가페 (agape)”로 번역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진짜로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하는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시험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당한 마지막 시험은 이삭을 더 사랑하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에 더 순종하느냐에 관한 것입니다. 중국 교회 지도자였던 워치만 니는 이 부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시기 전에는 아브라함의 손은 비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이삭을 선물로 받은 후, 아브라함의 손은 이삭으로 꽉 차게 되었습니다. 이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교제하시려고 교제의 손을 내미십니다. 그럴 때, 아브라함은 손에 꽉 차 있는 하나님의 선물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손을 붙잡아 합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선물을 받고, 그 선물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그 선물을 내려 놓지 않으려고 하면, 하나님께서 손을 내미셔도 하나님의 손을 잡을 수가 없게 됩니다. 하나님보다 하나님의 선물을 더 사랑하면, 그 선물은 우상이 되고 맙니다.” 하용조 목사님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믿음의 마지막 테스트는 내가 사랑하고 가장 좋아하고 가지고 싶은 것을 얼마만큼 포기하는가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시험에서 합격했을까요? 네, 합격했습니다. 12절,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삶에서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혹시 그 선물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른 것은 다 건드려도 이것만은 절대로 건드리지 말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으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오늘 본문을 통해서 그 부분을 내려 놓기를 원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일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면, 우리의 손에 있는 하나님의 선물을 내려 놓으십시다. 그리고, 우리 하나님의 손을 붙잡으십시다.

2) 둘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독자”라는 말은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과 언약을 세울 것이고, 그 언약이 이삭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될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창 17:19) 그런데, 이삭은 아직 장가도 가지 않았습니다. 이삭에게는 아직 후손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지금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기 모순 같아 보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생각했을 때, 하나님의 말씀에 앞뒤가 맞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금 이삭을 죽이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당한 마지막 시험은 이성적으로 맞지 않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느냐의 시험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시험에서 합격했을까요? 네, 합격했습니다. 본문을 유심히 보시면, 아브라함이 하지 않은 일이 있고, 아브라함이 한 일이 있습니다.

(a) 아브라함이 하지 않은 행동이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대로,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은 자기 주장을 잘 펼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려고 하실 때, 아브라함은 중보 기도를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이러한 모습이 전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자기 주장을 펼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자기 주장을 해야 했다면, 바로 오늘 본문이 가장 적합한 상황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주장을 펼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이삭을 통하여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요? 이삭은 아직 결혼도 안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지금 자기 모순에 빠지신 것입니다. 이 이삭이 죽으면, 어떻게 이삭을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하나님은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100세에 주신 아들을 빼앗아가실 수가 있습니까? 그것도 제 손으로 제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고요?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맞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이삭을 번제로 드리면, 하나님은 인신제사를 받는 이방신들과 다를 바가 없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화로운 이름을 위해서라도, 이 명령만은 거두어 주옵소서.” 이렇게 아브라함은 자기 주장을 펼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약속과 성품에 근거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시면,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아브라함의 모습이 전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아브라함은 그 반대의 행동을 행했습니다.

(b) 아브라함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즉각적이고도 온전히 순종한 것입니다.

3절,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자, 그 다음 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바로 떠난 것입니다. 4~5절,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하나님께서 지시한 모리아 산은 아브라함이 거주한 브엘세바에서 3일이 걸린 곳입니다. 3일 동안 여행하면서 아브라함의 마음 속에는 분명히 이런 저런 생각이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한결 같은 마음으로 온전히 순종한 것입니다. 이전 본문과 비교해 볼 때, 아브라함이 전혀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도대체 아브라함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요?

2. 둘째, 하나님께서 믿음의 용량이 커진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 해답이 오늘 본문 1절 “그 일 후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그 일”이란 창세기 21장에서 일어난 사건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21장에 어떤 사건이 나옵니까? 창세기 21장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이삭이 태어난 것입니다. 창 21:1~2,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100세에 이삭을 품에 안은 아브라함은 무엇을 느끼고 깨달았을까요? 최소한 두 가지를 느끼고 깨달았을 것입니다.

1) 먼저,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다음과 같이 아브라함과 사라의 상태를 묘사합니다. 롬 4:19.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다.” 무슨 말입니까? 아브라함과 사라 모두 자식을 낳을 시기가 지났다는 것입니다. 자식을 낳을 능력으로 봤을 때, 그들의 몸은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죽은 몸에서 이삭이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과 사라는 죽은 몸의 부활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부활 신앙이 오늘 본문에도 그대로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비록 내가 이삭을 죽여도 하나님께서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려 주실 것이다는 믿음입니다. 히 11:17~19,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그래서 아브라함이 그의 종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5절,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2) 둘째, 하나님이 신실하신 분이시다.

다시 창세기 21장을 읽어 보겠습니다. 창 21:1~2,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여기에서 강조되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3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75세때 약속하셨던 말씀이 25년이 지난 100세에 그대로 성취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이삭을 품에 안으면서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 것을 반드시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이시다”는 것을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종합해 보면, 이렇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출생을 통하여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신실하심을 느끼고 깨달은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아브라함의 믿음의 용량이 커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본다면, 창세기 22장 오늘 본문의 사건은 분명히 아브라함의 생애 가운데 가장 큰 시험이었지만, 감당하지 못할 시험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여기 물병이 하나 있습니다. 여기에 소금을 두 숟가락 펴서 넣는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 조그만 물병에 소금을 두 숟가락을 펴 넣은 후, 물병을 잘 저어줍니다. 그리고, 이 물병에 담긴 물을 모두 마신다고 생각해 봅시다. 무슨 맛일까요? 물 맛이 아니라 짠 소금 맛일 것입니다. 아마 모두 마시지 못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똑 같은 양의 소금 두 숟가락을 올랜도 다운타운에 있는 에올라 호수 (Eola Lake)에 붓는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리고, 호수 물을 잘 저어줍니다. 그리고, 조금의 시간이 지난 후, 그 호숫물을 물병에 담아서 마신다고 생각해 봅시다. 무슨 맛일까요? 짠 맛은 거의 느낄 수 없고, 그냥 호수 물 맛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본 가장 큰 호수를 생각해 보시고, 그 호수에 소금 두 숟가락을 넣는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무슨 맛일까요? 제가 지금 무슨 말씀을 드리고 있는지 아시겠습니까? 소금을 시험이라고 가정해 봅시다. 그리고 물의 양을 우리의 믿음의 용량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물의 맛은 소금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물의 양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당한 시험은 인간적으로 봐도 큰 시험이었고, 신앙적으로 봐도 큰 시험이었음에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시험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감당할 만한 시험을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험 (test)이지요. 세상 학교에서도 중학생에게 대학원 수학 시험 문제를 내 주면서 시험 (test)하지는 않습니다. 하물며 우리의 사정을 다 보시고 아시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께서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을 내 주시겠습니까? 성경을 한 절 읽어 보겠습니다. 고전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여기서 말하는 “시험”은 헬라어로 “피라조 (peirazo)”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창 22:1에 나오는 “시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사 (nasah)”를 헬라어 70인역에서 똑 같은 단어 “피라조 (peirazo)”로 번역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같은 의미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떤 시험 가운데 있습니까? 그 시험이 너무나 커서 너무나 고통스럽고 감당하기 힘든 시험은 아닙니까?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상황과 마음을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은 허락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시험을 허락하시는 것일까요? 한 마디로,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신 8:16,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니라” 오늘 본문 후에 무슨 이야기가 나오는지 아십니까? 창 22:15~18,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마지막 말씀입니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라”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한 마디로 종합하면, “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시험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의 성품과 아브라함의 신앙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감당할 시험만 허락하신다. 시험을 당할 때, 아브라함처럼 즉각 순종하고 온전히 순종해야 한다. 그리할 때,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릴 수 있다.

3. 셋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사랑을 미리 보이신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이 신약 성경에서 주는 교훈에 대해서 간단하게 살펴 보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Gordon Wenham, “이삭의 희생 제사는 단지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기까지 헌신한 최고의 모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희생적 사랑에 대한 그림이다. 아브라함이 자기의 독생자를 희생 제사로 바쳤던 것처럼, 성부 하나님은 세상을 위하여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셨다.’ 아브라함의 뜻에 기꺼이 순종한 이삭의 모습에서 우리는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씀하신 아들의 모습을 본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병행을 이룹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순종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1) 먼저, 모리아 산이라는 장소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2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대하 3:1,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 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 예루살렘 성전이 모리아 산에 건축되었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형 선고를 받으시고, 바로 그 옆 골고다 언덕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한 장소와 동일한 장소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입니다.

2) 둘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2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네가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드리라.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내가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를 주노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3) 셋째, 예수님의 순종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6절,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요 19:17, “그들이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가시니” 이삭이 자신을 번제로 사를 나무를 지고, 모리아 산을 올랐던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화목제물로 매달 나무 십자가를 지고 모리아 산으로 오르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삭의 나이는 얼마나 되었을까요? James Montgomery Boice, “창세기 23장은 사라가 127세에 죽었다고 말하는데, 그 때 이삭은 37세가 되었을 것입니다. 창세기 22장의 사건은 그 37년 중, 어느 시점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희생 제물을 드릴 때, 이삭의 나이는 최소한 10대 후반이었을 것이고 (희생 제물을 올려 놓아야 하는 많은 양의 번제 나무를 지고 모리아 산을 오를 수 있을 나이), 어쩌면 30세 혹은 33세였을지도 모릅니다. 혹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처형을 당하신 때의 나이인 33세는 아니었을까요? 어째든 이삭은 그가 하고자 했었다면, 아버지 아브라함의 의도에 저항이 불가능할 만큼 어리지는 않았습니다.” Tremper Longman III, “이 무렵 이삭이 결코 어린 아이가 아니라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그는 큰 소년이었거나, 어쩌면 제사에 쓸 나무를 어깨에 메고 갈 수 있으며, 되어가는 일을 물을 수 있을 만큼 다 자란 성인이었다.”

4) 마지막으로, 수풀에 걸려 있는 숫양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13절,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Alister McGrath, “아브라함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가시덤불에 걸린 숫양 한 마리를 발견하게 된다. 그는 이삭 대신 이 숫양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본문을 읽을 때, 하나님의 어린 양인 예수 그리스도가 가시관을 쓴 채, 죄뿐인 인류를 대신하여 자신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린 사실을 기억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앨리스터 맥그래스 교수는 숫양의 뿔이 걸린 수풀은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서식하는 가시덤불로 본 것입니다. 그리고, 약 2,000년 후, 로마 군병들이 이 모리아 산에 있는 가시덤불의 가시를 꺾어서 예수님의 머리에 가시관으로 씌운 것이라고 해석한 것입니다.

III.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결국, 창세기 22장은 무엇에 관한 이야기입니까? 절망가운데 있는 인류의 상황과 마음을 보시고, 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하시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하용조 목사님의 설명입니다. “결국 예수의 이야기입니다. 이삭의 이야기는 예수의 이야기이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이야기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내어주는 아버지의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번 한 주간 살아가면서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를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달려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신 예수님을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내어줄 수 있을까요? 우리는 예수님을 위해 무엇을 순종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