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설교] 용서와 약속의 십자가 – 041419

용서와 약속의 십자가
눅 23: 32-43

I. 서론

오늘은 질문을 하나 드리고, 말씀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왜 골고다 언덕에 높이 솟은 십자가는 하나가 아니고, 세 개였을까요?” “왜 예수님께서는 혼자 십자가에 달리지 않으시고, 좌우편에 두 강도가 함께 달렸을까요?” 4복음서는 공통적으로 예수님께서 달리신 십자가 좌우편에 두 명의 강도들이 함께 매달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에 중요한 메시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소한 네 가지 정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십자가 위의 두 강도는 죽어가고 있었는데,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도 태어나자마자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2) 십자가 위의 두 강도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구원할 수 없었는데,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도 자기 자신을 스스로 구원할 수 없습니다. 3) 강도 중 한 명은 천국에 갔고, 다른 한 명은 지옥에 갔는데,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도 일부는 천국에 가고, 일부는 지옥에 갈 것입니다. 4) 구원받은 강도는 자신의 선행이 아닌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는데,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도 자신의 선행이 아닌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상의 두 강도는 모든 인류를 대표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질문을 하나 던지고 싶습니다.

구원받은 강도는 언제부터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일까요? 만약 오래 전에 예수님을 믿었다면, 십자가형을 선고받을 정도로 행악자가 되지는 않았을텐데 말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놀랍게도 십자가에 못박힐 당시만 해도 두 강도 모두가 예수님을 욕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7:39~44,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구원받은 강도가 변화된 것은 십자가 위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어떻게 십자가 사형언도를 받을 정도의 행악자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까요?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이에 대한 그 힌트를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용서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1. 첫째, 예수님의 용서의 말씀

눅 23:33~34,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 첫 번째로 하신 말씀이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저들”이란 누구를 말할까요? 일차적으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로마 군인들일 것입니다. 한글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영어성경에서는 “they”라고 분명히 나오고 있고, 헬라어성경에서도 “삼인칭 복수”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차적으로는, 예수님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고, 예수님을 로마 군인에게 넘겨준 빌리도 총독일 것입니다. 삼차적으로는,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긴 유대 종교지도자들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그들”이 누구인지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힘이 없으셔서 강제적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에 베드로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 26: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한 군단은 6,000명입니다. 그러니 열두 군단은 72,000명을 말합니다. 72,000명이 더 되는 천사가 와서 로마 군병을 물리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우리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지 않으면, 우리가 십자가에 못박혀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십자가”에 대해 너무나 피상적인 말만 많이 하기 때문에 “십자가”의 형벌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잘 모릅니다. 예수님 당시 로마 사람들은 “십자가”라는 말을 입에 담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라는 말만 들어도 밥맛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사실, 한번이라도 십자가 처형을 본 사람은 일평생 그 장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필립 라이큰 목사님이 쓴 책 <십자가 복음>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의학박사 루먼 데이비스 (Truman Davis)는 십자가형의 고통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십자가가 땅에 놓인다. 그러면 매우 지쳐버린 죄수를 나무에 재빨리 누인다. 로마 군병은 손목을 더듬어 움푹 들어간 곳을 찾는다. 그러고는 철로 된 묵직한 사각형 모양의 못을 손목에 대고 나무를 관통할 때까지 내리 박는다. 재빨리 그는 다른 편으로 옮겨가서 똑같이 한다. 못을 다 박으면 십자가를 들어 세운다. 그리고 왼발을 오른발 위에 포갠다. 두 발은 쭉 펴고 발가락은 아래를 향하게 하지만 무릎은 적당히 굽히게 한다. 이제 죄수는 십자가형을 당한 것이다. 온몸이 천천히 늘어지기 시작하면 손목에 무게가 더 많이 실리면서, 극심하고 격렬한 고통이 터질 것처럼 손가락부터 팔을 타고 머리까지 올라온다. 손목에 박힌 못이 중추신경을 강하게 압박하기 때문이다. 뻗쳐오르는 고통을 피해 보려고 자신의 몸을 들어 올리지만, 그럴수록 자신의 무게가 못에 박힌 발에 온전히 실리게 된다. 그러면 다시 발의 뼈 사이에 박힌 못이 신경을 찢으면서 타는듯한 고통이 밀려온다. 이제는 팔에 힘이 빠지면서, 욱신거리는 극심한 고통이 계속되고 근육 전체에 심한 경련이 엄습해 온다. 이렇게 경련이 일어나면 몸을 곧추세워 호흡을 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폐 속으로 공기가 들어가기는 하지만 숨을 내쉴 수는 없다. 그래서 짧은 숨 한 모금을 마시기 위해서 온 힘을 짜내야 한다. 무한한 아픔이 몇 시간째 지속되고, 관절을 쪼갤 것 같은 경련이 일어나, 간헐적으로 기절을 한다. 이제 또 다른 고통이 시작된다. 심장막이 점점 혈청으로 채워지면서 천천히 심장을 압박하기 때문에 가슴 깊은 곳부터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이 느껴진다. 근육 조직에서 수분이 거의 다 빠져나가 위급한 지경에 이른다. 극렬한 고통에 빠진 폐는 공기를 한 모금이라도 더 들이마시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이제 예수님은 온몸의 조직을 통해 조여 들어오는 죽음의 냉기를 느낀다.”

그런데, 이 모든 고통을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것도 발가벗겨진 채로 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형벌을 받으신 이유는 우리가 십자가 형벌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은 우리 자신인 것입니다. “초대교회 교부였던 아타나시우스는 십자가를 묵상하다가 깜빡 잠이 들어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누군가 예수님께서 달리신 십자가에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는 누군가가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내려놓으려고 올라가는 모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망치를 들고서 다시금 예수님의 손과 발에 못 박는 것이 아닙니까! “쾅! 쾅! 쾅!” 망치질을 할 때마다 예수님은 몸서리를 치셨습니다. 아타나시우스는 “도대체 어떤 놈이 또다시 우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냐”라고 소리치며 달려갔습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범인의 머리채를 확 잡아 돌렸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은 다름 아닌 아타나시우스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용서의 말씀은 구원받은 강도에게 큰 충격을 주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만일, 십자가상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용서의 말씀이 아니라 저주의 말씀이었다면 구원받은 강도는 결코 예수님을 믿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을 향해서 용서의 말씀을 하셨을 때, 성령께서 구원받은 강도의 마음에 역사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강도는 예수님께서 평범한 인간이 아니심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리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성령께서 역사하시자, 구원받은 강도에게 세 가지 일이 일어납니다.

2. 둘째, 구원받은 강도에게 일어난 변화

1) 먼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39~40절,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구원받은 강도가 가졌던 두려움이 어떤 두려움인지 정확히 모릅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자신이 지금 받고 있는 십자가의 형벌이 자신의 죄에 대한 최종적인 형벌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죽음 이후에 하나님께 받을 심판이 있음을 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에 대한 형벌을 받고 있음에도 하나님을 두려워한 것입니다. 저는 현대 기독교가 균형을 잃었다는 생각을 종종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성경의 메시지를 온전히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귀에 듣기 좋은 말만 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많이 강조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는 언급을 많이 하지 않습니다. 언급을 하지 않는다고 없어지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신앙 생활하면서 얼마나 두려운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십니까?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상징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만큼 죄에 대한 철저한 심판을 상징하는 것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인정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구원받은 강도는 비록 십자가상에서였지만, 자신의 죄를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거기서 그친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 지에 대해 고백한 것입니다.

2) 그 다음으로,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신앙고백을 합니다.

39~41절,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이 말은 작은 소리로 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가운데 계셨기 때문에 이쪽 강도가 저쪽 강도에게 말하기 위해서는 소리를 쳐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이것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릴 정도의 죄를 지은 분이 아니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선언하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왜냐하면, 그 다음에 “당신의 나라”라는 말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42절,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그러니까, 구원받은 강도는 예수님에게는 “예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가 있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놀라운 것은 구원받은 강도의 이 고백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이 아니라 지금 자신과 똑같이 십자가에 못박혀서 신음하는 모습을 보고 한 말입니다. 참으로 대단한 믿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참 믿음은 육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영의 눈에는 보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선한 사람, 존경할만한 인물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에 대해서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인간 이상의 존재, 즉, 하나님이 아니라면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졌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몇 가지 예수님의 자기 주장을 살펴 보겠습니다. 1) 예수님은 자신이 천지가 창조 되기 전에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요 17: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2) 예수님은 자신이 곧 하나님이라고 주장합니다. 요 10:30, 33,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3) 예수님은 자신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합니다. 요 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영국 캠브리지 대학 채플 시간에 유명한 설교자 한 분이 오셔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자”라는 것이었습니다. 예배가 끝난 후, 한 학생이 설교자를 찾아와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당신이 이런 지성의 대학 강단에서 예수만이 구원자라고 설교한 것에 실망했습니다. 왜 당신은 도덕적 모범으로서의 예수를 전하지 않았습니까?” 이 질문을 받고, 설교자는 그 젊은이에게 이렇게 되물었다고 합니다. “만일 제가 도덕적인 모범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다면, 학생은 그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사시겠습니까?” “아, 그야 물론이죠.” 이에 설교자가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도덕적으로 죄가 없는 완전한 분이셨습니다. 학생도 죄를 짓지 않고 도덕적으로 완전한 예수님처럼 살 수 있습니까?” “아, 그거야 불가능하죠. 제가 어떻게 완전히 무죄한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설교자가 대답합니다. “그렇다면, 학생의 삶 속에 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까?” 학생이 대답합니다. “네, 그것은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설교자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학생에게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자라고 소개한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우리 중에 그 누구도 완전한 의인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도덕적 모본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물에 빠져 죽어 가는 사람에게는 구원자가 필요한 것이지 도덕적 모델이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주장을 사실로 받아들여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든지 아니면, 예수님의 자기 주장은 거짓된 것으로 예수님을 거짓말쟁이거나 정신병자로 취급하든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그 중간에 여지를 남겨두지 않으셨습니다.

3) 마지막으로, 구원받은 강도는 예수님께 자신의 영혼을 맡겼습니다.

42~43절,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비방할 때에는 한 마디로 대꾸하지 않으신 주님께서 버림받은 강도가 회개하고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부탁하자, 예수님께서 드디어 입을 열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말씀하신 7마디 말씀 중에 두 번째 말씀이셨습니다.

III.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아무리 흉악한 죄를 지은 죄인이라고 할지라도 주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자신의 영혼을 맡기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외면치 않으시고, 천국을 약속해 주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은 아무리 검은 죄라고 할지라도 희게 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는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을 위해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번 한 주간 살면서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시다. 성령께서 우리를 감동시키실 때에 믿음으로 고백하십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천국의 기쁨을 맛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드립니다.